펑크 스타일의 낙관주의자, 다니엘 리히터
펑크 스타일의 낙관주의자, 다니엘 리히터
  • 권미나 기자
  • 승인 2022.08.10 0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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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K 서울에서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을 감상중인 관람객들. [사진=권미나 기자]
스페이스K 서울에서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을 감상중인 관람객들. [사진=권미나 기자]

독일을 대표하는 동시대 회화작가 중 하나인 다니엘 리히터의 아시아 첫 개인전 나의 미치광이웃(My Lunatic Neighbar)’이 스페이스K 서울에서 진행중이다.

사회적 이슈와 언론매체의 이미지, 대중문화 등의 사회현상에서 받은 영감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언어로 표현하는 다니엘 리히터의 이번 전시에는 구상 회화가 시작되는 2000년대의 작품부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최신작까지 25점의 작품이 소개됐다.

전시 주제인 '나의 미치광이웃(My Lunatic Neighbar)' 이웃이라는 뜻을 가진 '네이버(neighbor)'의 철자를 의도적으로 바꿈으로써 예술은 기존의 상식과 지식을 깰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 특유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다니엘 리히터. [사진=스페이스K 서울]
다니엘 리히터. [사진=스페이스K 서울]

20대에 사회 운동과 펑크 록 음악에 심취해 있었던 다니엘 리히터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밴드의 포스터와 앨범 재킷을 그리는 등의 시각 예술 활동을 하다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계기로 삶을 돌아보게 되면서 함부르크 예술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작가는 예리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신문 기사, 잡지, 영화, 미술사, 광고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재해석해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고 우리 삶의 공포와 불안을 포착하여 보는 이의 예상을 비켜가는 표현방식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지루해진다는 작가의 말을 반영하듯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1990년대에는 추상의 자유로움을 실험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서사가 강하게 드러나는 구상화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커다란 화면에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화면구성과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작업함으로써 현대적 역사화로 평가받고 있다. 2015년부터는 강력한 색과 선으로 인물들의 행동을 단순화 시켜 다시 추상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다니엘 리히터, 투아누스(Tuanus)_Oil on canvas_252x368cm_2000 [사진=권미나 기자]
다니엘 리히터, 투아누스(Tuanus)_Oil on canvas_252x368cm_2000 [사진=권미나 기자]

투아누스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친근하고 감각적인 회화 기법을 참고하여 그린 작품으로 마약 중독자들이 모인 공원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커다란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경찰의 심문을 받는 사람들처럼 보이다가도 마치 성적으로 서로를 유혹하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작가는 특정 상황을 설명하고 묘사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엉켜서 만들어진 모양새나 분위기에 집중하면서 화려한 색감으로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고 일렁이는 환영감을 부여해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다니엘 리히터, 피녹스(Phienox)_Oil on canvas_252x368cm_2000 [사진=권미나 기자]
다니엘 리히터, 피녹스(Phienox)_Oil on canvas_252x368cm_2000 [사진=권미나 기자]

피닉스(phoenix)에서 두 모음을 바꿔 만들어진 피녹스(Phienox)’1989년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던 날과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동시에 벌어진 미국 대사관 폭탄테러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두 사건이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발생했지만 겉으로 견고해 보이던 사회·정치구조의 몰락이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수평선상에 놓인 역사의 반복이라고 보고 스스로 몸을 태우고 다시 살아나는 전설의 새 피닉스에 빗대어 몰락과 부흥을 반복하는 정치와 역사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또한 화면 안에 적외선 카메라로 투과되어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인물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특정 사건에 한정되지 않는 광의의 역사화를 만들었다.

2011년에 그려진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 [사진=권미나 기자]
2011년에 그려진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 [사진=권미나 기자]

다니엘 리히터가 2011년에 그린 일련의 회화에는 험난한 산세와 특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시기는 작가가 낭만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던 시기로 이방인, 오리엔탈리즘, 모험, 영웅, 자연의 장엄함 등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의 클리셰들을 새롭게 재현했다.

다니엘 리히터, 그러나 너를 돕는 건 내 본성에 어긋나, 라고 늑대가 말했다(Es Liegt Aber, Sagte Der Wolf, Nicht In Meiner Natur Dir Zu Helfen)_Oil on canvas_180x240cm_2011(좌)/부분 상세 사진(우) [사진=권미나 기자]
다니엘 리히터, 그러나 너를 돕는 건 내 본성에 어긋나, 라고 늑대가 말했다(Es Liegt Aber, Sagte Der Wolf, Nicht In Meiner Natur Dir Zu Helfen)_Oil on canvas_180x240cm_2011(좌)/부분 상세 사진(우) [사진=권미나 기자]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안개로 휩싸인 대자연을 벼랑 끝에서 내려다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렸다. 그 뒷모습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의 용기와 능력이 담긴 낭만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다니엘 리히터의 화면에서 남자의 위치는 바뀌었다. 남자는 벼랑 끝에 매달린 채 늑대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고 벼랑 끝에 당당하게 서있는 늑대는 담배를 쥔 채 너를 돕는 건 내 본성에 어긋나라고 말하며 남자에게 오줌을 갈기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위태로워진 낭만과 현실에 부딪힌 자유와 꿈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니엘 리히터, 눈물과 침(Tränun Und Gesabber)_Oil on canvas_220x165cm_2021(좌)/다니엘 리히터, 개쩌는 음악(Sick Music)_Oil on canvas_200x270cm_2018(우) [사진=권미나 기자]
다니엘 리히터, 눈물과 침(Tränun Und Gesabber)_Oil on canvas_220x165cm_2021(좌)/다니엘 리히터, 개쩌는 음악(Sick Music)_Oil on canvas_200x270cm_2018(우) [사진=권미나 기자]

강한 실루엣과 원색의 표현이 인상적인 눈물과 침1차 세계대전으로 다리를 잃은 독일 소년병 두 명이 목발을 짚은 채 나란히 걸어가는 엽서 사진에 영감을 받아 작업한 작품으로 전쟁의 부조리와 슬픔을 캔버스에 모두 옮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캔버스를 일종의 회화적 실험대로 삼아 선과 색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거친 윤곽선과 안팎으로 번진 물감은 즉흥적으로 그려진 듯 보이지만, 배경을 오직 한 두가지 색으로 평평하게 칠해 대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한 점이나, 파랑과 주황의 보색을 배치해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성취한 점은 작가의 치밀한 구성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개쩌는 음악은 세 개의 몸이 서로 엉켜 있는 듯한 모습이 연상되지만 명확한 신체의 이미지라기보다 왜곡되고 조각난 상태로 흩어진 색덩어리로 묘사됐다. 크게 벌어진 입은 비병을 지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펑키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신체끼리 얽힌 관능적인 순간을 포착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며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스페이스K 서울에서 다음 달 23일까지 볼 수 있다.

한편 다니엘 리히터는 프랑크푸르트 쉬른 미술관,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회를 가졌으며 덴버 미술관, 도이치뱅크, 뉴욕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최근에는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아테네오 베네토(Ateneo Vento)에서 대규모 신작 전시를 진행 중이다.

권미나 기자 christine1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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